[추자혜 레지던시 3기 입주작가 결과발표전, 섦을 걷기(2025/11/26 - 2025/12/14), 해동문화예술촌. 전남]


땅의 기억을 채집하며, 최근희의 작품세계


고영재(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 미술비평)


디지털이 이미지를 즉각 생성한다면, 아날로그는 시간, 몸, 행위, 물질이 서로의 흔적을 교환하며 더딘 공조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불완전성, 뉘앙스 등은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밀도를 구축한다.

작품세계에 아날로그의 ‘과정’과 디지털의 방법론을 모두 함의하는 최근희의 작품은 전통적 개념의 사진에서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진이 시작될 때 품었던 질문을 상기한다. 사진은 빛이 물질의 표면에 남긴 화학적 흔적에서 비롯된 매체다. 즉, 사진에서 이미지란 단순히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세계가 남긴 흔적(trace)이자 지층(layer)이며 시간의 침전물이다. 최근희가 특정 장소의 잡초와 흙을 채집하고, 그 흙으로 배경이 되는 물질을 염색하며, 잡초의 생명력과 회복성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은 바로 이 사진의 원리, 즉 ‘빛과 물질이 만나는 현상’을 확장하는 행위와 닮았다. 향수자는 작업의 결과물에서 종종 그 기저에 깔린 사진을 인지하지 못하지만, 장소와 시간의 역사적·생태적 층위를 담보하는 잡초, 그리고 그것의 재현 방식에서 외부세계와 조우하는 사진 특유의 습성을 제고해 볼 수 있다.


지속된 자기 투영

3년째에 접어들고 있는 잡초(The weeds) 시리즈는 흔히 예술을 업으로 하는 이들의 창작 습관인 자기 투영에서 시작됐다. 식물도감 등에 분명 이름이 있을 테지만, 이름 없이 살아가는 밟히고 치이는 들풀들을 보며, 소위 ‘잡초’와 작가로서의 ‘자아’를 동일시 하게 된다. 달리 보면, 들풀 하나하나의 이름을 찾아주고 미적 형식으로 생존의 의미를 되새기는 행위는 철저히 창작의 의도에서 단행된 작업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 투영과 치유의 과정에서 길어 올린 태도적 산물일 것이다. 작업의 과정은 크게 다섯 단계를 거친다. 먼저 보통의 길거리, 혹은 특정 장소에서 풀을 채집하고 다음으로 채집된 풀을 압착한다. 압착된 풀은 촬영과스캔을 거친다. 여기까지가 기본 레이어이다. 종이나 천을 염색하여 작품의 배경으로 삼는데, 커피 찌꺼기나 최근 들어선 채집된 곳의 흙으로 배경이 되는 물질을 물들인다. 이 네 번째 단계가 또 하나의 레이어이다. 결국에는 언급한 두 레이어를 디지털의 방법으로 합성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 배경, 대상물의 윤곽선 등은 반전되며 청사진(Cyanotype)의 미감과 유사한 짙은 푸른색, 솔라이제이션(solarization)에서의 광학적 반전 효과와 비슷한 질감들이 도출된다.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로 치환했지만, 디지털 매체의 정교함이 외려 아날로그의 감수성을 끌어내는 점은 최근희 작업의 독특한 성질이다. 작가 스스로의 표현대로  “사진 매체의 언어로 봐줬으면 좋겠다. 셔터를 누르는 행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objet) 선택에서 시작해 하나의 이미지가 나오기까지의 과정들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은 몸을 통해 장소와 접촉하며 그 기억을 물질적으로 옮겨오는 과정 자체가 그저 풍경을 기록하는 종류의 시각 채집은 아니기 때문에 비롯된 소감이다.

작가는 장소에 남아 있는 물질적·비물질적 흔적을 직접 손에 담아 옮겨오며, 그 과정 자체를 하나의 서사로 구축한다. 최근희가 채집한 도깨비가지, 민망초, 청비름, 애기나팔꽃, 털개구리미나리, 여우팥, 털까마중, 개맨드라미 등은 작명되기까지의 저간의 사정들을 내포한다. 그가 다룬 들풀 중에는 먹거리가 부족한 시절에 나물로 쓰였던 풀들도 있다. 종국에는 쓰임이 다해 잡초로 명명 되어졌지만, 필요와 불필요, 관심과 무관심에 의해 그 존재 의의가 뒤바뀌는 것은 비단 들풀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생존하는 모든 존재들은 반드시 소멸한다. 이 소멸 또한 살아감의 한 과정으로 인식해야 함을 작가는 끈질기게 뿌리 내리는 잡초를 통해 이야기한다.

  

생의 기억이 응축된 장소

타지역에서 나고 자란 작가가 담양에 정주하면서 천착한 지점은 무엇일까. 서술했다시피, 최근희는 들풀을 매개로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생태를 연결하는 독특한 감각을 보여준다. 작가가 채집한 잡초와 흙은 특정한 시간이 응축된 장소의 층위이며, 땅이 지난한 시간에 걸쳐 저장해온 기억의 조각들이다.

담양에서 이어진 잡초 연작은 흙을 일차적인 재료로 다루지 않고, 기억을 보존하는 하나의 매체, 혹은 역사의 흔적을 품은 증거로 간주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작가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 기억의 형상이 남아 있는 기념 공간과 장소들을 답사하며 흙과 그곳에서 자생하는 식물들을 채집했다. 만성리 관어공원 현충탑의 고사리, 담양역 기초석터에서 발견한 강아지풀과 민바랭이, 담양 중앙공원 내 소녀상 부근의 질경이, 여순사건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지의 쇠무릎, 담양읍 외다마을 보호수의 닭의장풀 등 과정형의 시간 안에서 뿌리 내린 잡초와 잡초가 살아온 흔적들에서 생명의 지속성 및 근원의 생명력을 길어 올린다.

채집된 흙은 염료로 사용되었고, 천을 물들일 때 발생하는 색의 차이는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이었다. 주변 식생의 조건에 의해 구분되는 토양의 색감은 그 차이가 분명했지만, 염색 과정에서 불순물이 제거되면서 흙의 색들이 점차 비슷해졌다는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장소가 지닌 개별적 차이가 사라지고, 토양이라는 물질의 본질이 드러나는 이 과정은 기억의 표층과 심층, 사건의 흔적과 자연의 순환, 지역성과 보편성을 두루 함축한다. 또한 잡초의 분포는 각 장소의 생태적 조건을 정확히 반영하며, 그 생명력은 문명의 역사보다 오래 지속되는 자연의 질서를 환기한다. 이들은 인간의 기억이 역사적 기념물이나 문헌 속에서 고정적으로 재현되는 방식과 달리, 시간을 흡수하여 생태적 흔적으로 남는 기억의 다른 형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최근희의 작업은 기억을 사진적 이미지로 기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 생태 환경에 의해 구축된 들풀과 토양은 단지 자연적 요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과 사, 사건의 발생과 소멸, 환경 변화와 순환의 에너지를 증명하는  하나의 복합적 구조에 다름 아니다. 최근희는 이 구조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장소와 결부된 정치·사회사적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시각적 전이를 통해 옮겨온다. 재현이나 복원이 아닌, 땅의 기억을 살아있는 이의 감각으로 다시 체감하도록 만드는 매개적 특질에서 최근희 사진 작업의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업 과정의 복잡성이 실재성과 기록에 기반한 사진 매체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유도하지는 않는다. 또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결합은 완성도 면에서 풍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둘의 관계성이 작가 스스로 충분히 논리적이거나 언어화되지 않을 경우, 형식적 병치로 보일 위험도 존재한다. 이는 작업이 발전하고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매체와 개념 상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작업세계의 특수성을 확장해 나갈지 고민해 봐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대구예술발전소 14기 입주작가 성과전, 파편화된 알고리즘(2024/11/01 - 2024/12/01), 대구예술발전소. 대구]


죽음을 염두 하는 삶, 식물에서 찾은 삶의 태도


고충환(미술평론가)

 

길을 걷다 보면 이름 모를 들풀들이 있다.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이 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그 들풀들에, 잡풀들에 눈길이 갔다. 이름이 없지는 않을 것인데도 이름 없이 살아가는 들풀들이,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이 꼭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저들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지만 세상인심과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모습이, 존재가 저 자신의 모습을 닮았고 존재를 닮았다. 그래서 들풀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주기로 했고, 잡풀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되찾아주기로 했다. 그러므로 그 기획은 잡풀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되찾아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새삼 되새기는 기회도 될 것이었다. 들풀들에 기댄 것이지만, 잡풀들을 빌린 것이지만 이를 통해 정작 자기 자신을 묻는, 자기반성적인 작업이 될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서 미학적 가치가 열린다. 그렇게 비록 사사로운 일이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들풀들에,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있는 것들에 한 번쯤 자기를 동일시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게 작가는 들풀들을 채집하고 잡풀들을 채집했다. 광대나물, 붉은토끼풀, 강아지풀, 고들빼기, 금강아지풀, 금불초, 꽃범의꼬리, 끈끈이대나물, 만수국아재비, 민바랭이, 서양민들레 등등. 몇몇을 빼고는 대개 이름마저 생소한 것들이지만,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들이지만, 빨간 밑줄이 생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름 그대로일 것이다.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의태적인, 그러므로 사람이 보거나 사는 꼴을 흉내 내 이름을 지은 것 같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식물들을 채집했고, 하나하나 이름을 찾아주었다. 그렇게 채집하고 건조한, 표면을 커피로 염색한 오브제 그러므로 피사체를 반전시킨 사진을, 다크블루 바탕에 마치 엑스레이 필름을 통해서 보듯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화 정착한 사진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보통의 아날로그 사진에서는 네거티브 형태의 필름을 확대기를 통해 포지티브 이미지로 반전 표현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디지털 파일 형태의 포지티브 이미지를 포토샵을 통해 네커티브 이미지로 반전시켜 표현한 것이 다르다. 디지털을 이용하지만, 아날로그의 느낌을 살렸다고 해야 할까.


최근 사진의 한 경향이지만, 이미지(화소) 중심의 사진이 결여하고 있는 질감과 물성을 빌려 회화적 분위기를 겨냥한 복고풍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디지털을 묻는, 그리고 과정에서 파생되는 역설을 다루고 있는 사진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은 초기에 회화적 사진으로부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무슨 화학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허다한 실험들이 있었고, 그 실험의 많은 부분이 진화의 이름 아래 잊혔고, 그렇게 잊힌 실험들이 첨단을 구가하는 디지털 시대에 다시 불려 나오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디지털이 주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온갖 생생한 이미지가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역으로 사진이 태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빛이 그린 그림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화학실험실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적인 물성과 질감과 분위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질적인 이미지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수집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분더카머(Wunderkammer)의 추억이, 유년 시절 어린 식물학자의 추억이 그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런 시대 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식물들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사는 방법을 죽음을 염두 하는 삶이라고 불렀다. 왜 염려하는 삶이 아니고, 염두 하는 삶이라고 했을까. 염려하는 삶과 염두 하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죽음을 염두 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마도 죽음을 염려하는 삶, 그러므로 삶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멀리하는 삶이 아니고,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삶, 죽음을 삶처럼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죽음 자체만 놓고 본다면 바니타스 그러므로 무상한 삶의 또 다른 한 버전일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블루에는 우울한 기질을 의미하는 문명사적 배경이 있다. 다크블루. 블루가 깊다. 우울이 깊다. 작가가 삶을 들여다보는 색깔일지도 모르고, 깊이인지도 모를 일이다. 

[13년의 밤(2022/11/12 - 2022/12/04), 아트 스페이스 루모스. 대구]


가늠 못 할 흔적의 스케일


윤규홍(오픈스페이스 배 아트디렉터 / 예술사회학)

 

한눈에 봐도 흥미로운 연작이 여기 있다.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거쳐온 과정도 재미있다. 사진가 최근희는 가까운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서 들고 작업실로 가길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 마신 커피 종이컵 바닥에 남은 찌꺼기를 보게 되었다. 수분이 마르고 새겨진 흔적은 매번 달랐다. 작가는 그 흔적을 보고 바로 터키식 커피인 이브릭 커피를 떠올렸다. 터키인들은 남은 커피 찌거기를 통해 하루 운세를 점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작가는 이런 타세아그라피(tasseography) 대신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초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연히, 사진이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방법을 바꾸고 숙련도를 올린 현재 결과는 컵 바닥면을 카메라 대신 정밀한 스캐너로 찍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보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스캐닝 이미지는 반전(inverting) 효과를 통해 딴판이 되었다. 황갈색의 톤이 푸른 빛의 극성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은하계 별과 그것들 사이에 퍼진 먼지가 비친 성간운처럼 파랗게 빛나는 형상과 비슷하다. 예컨대 겨울철이면 우리의 맨눈으로도 볼 수 있는 황소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의 자태는 자연과학계와 아마추어 마니아층을 넘어 대중적인 아이콘으로 뜨고 있다. 파란 성운은 토성의 고리나 우리 은하계의 소용돌이 사진 같은 것들을 누르고 천체의 친숙한 이미지로 자리 잡았고, 작가는 그 이미지를 자기 작품의 레퍼런스로 대놓고 흘린다. “Like a universe image”라는 표제는 이런 속임수와 실토를 함께 품고 있다. “우주 이미지 같은”이란 말은 진짜가 아니란 뜻이지 않나? 이런 논리 설정을 통하여 작가는 스스로 묻는다. “우리가 보는 것은 진실일까?”, “시각예술은 진실에 가까워야 하나, 환상을 받아들여야 하나?”와 같은 조금은 고전적인 질문이다.

 

이런 정보 없이 최근희 작가가 공개한 작업을 보는 관객들이라면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스포일러 구실을 한다면, 모른 채 작품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래야만 이 사진 작업이 품은 미적 성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뒤따르는 반전까지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작가가 파놓은 인지의 덫을 웬만큼 알고 피하는 감상자들조차 피하기 어려운 당혹스러움이 있다. 이런 당혹감은 주로 두 가지 이유로부터 생기는 것인데, 하나는 작가의 이전 작업 주제와 다르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작품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이질감이다. 이는 세계에서 벗어난 낯섦, 경이, 소외, 불안, 침잠, 탐구, 공포, 환영, 향수 같은 감정이 뒤얽힌 복잡한 매혹이다.

 

이러한 미적 유혹의 민낯이 많은 이의 평범한 일상에 속한 하나란 사실은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익숙한 대상의 또 다른 면모를 촬영한 이미지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당장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더라도 수두룩한 그것들은 대체로 피사체에 근접하거나 확대한 광학기술에 의지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미시계를 망원경으로 관측되는 거시계로 보이게끔 하는 속임수 또는 동형이질성 연출은 이제는 하이테크라는 말이 민망한 기술로도 구현되는 시각효과다. 말하자면 한 때 작가가 자주 생각했던,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명제 대신 모르는 만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런 현상은 예술 제도보다 다른 곳에서 자주 벌어진다. 따라서 이런 착시효과를 예술의 명분으로 굳이 끌어들일 필요가 있는가라는 지적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작가 최근희는 사진에서 곧이곧대로 보려는 직시성을 그것의 첫 번째 가치로 둔다. 사진이 사진답다는 요건을 채우는 허용범위를 설정하는 셈이다. 사진술의 발명과 초기의 사회적 기능을 중심에 둔다면, 많은 사진가처럼 그 역시 근본으로부터 흩어져 나간 편차를 예술적인 시도로 본다. 이 연작을 준비하면서 작가가 쓴 수기에는 자신의 작업이 사진 예술의 조건에 도그마에서 지나치게 벗어났다는 자백을 한다. 대신, 그는 자기 작업을 회화적 요소를 받아들인 실험으로 옹호하면서 여러 지적에 맞서려고 한다.

 

“이번 작업은 사진적 표현 언어가 아닌 미술적 표현 언어 중 하나인 심상으로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사진이 사실적인 표현 매체라면, 미술은 추상적인 표현 매체다.”


이 발언이 합당하다면, 그가 이번에 카메라 대신 쓴 스캐너는 회화에서 밑그림에 해당할 것이고, 컴퓨터 키보드와 타블렛은 붓이 된다. 확대한 커피 흔적은 평소에 안 보였던 세밀함이 드러났고, 작가는 이 단서를 점과 선과 면의 미술 조형 요소에 대입하여, 어떤 건 지우고 어떤 건 돋우는 손질을 가했다. 이런 포스트 프로덕션에 작품당 한 달의 시간이 걸린다. 본인의 고유한 작업을 그림 그리기에 비유하는 도식은 옳다. 하지만 작가는 사진의 매체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중에 너무 좁게 정의했으며, 미술 또한 그 범위를 추상 표현의 영역으로 가두었다. 오늘날 시각예술은 장르 간 경계가 옅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희 작가의 자기규정이 편협하다기보다 겸손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의 신작은 말하자면 사진에서 회화로의 이행을 뜻할 터인데, 이게 사진이나 회화로 양분된 진영에 누구의 허락을 받고 창작과 발표를 해야 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도 작가는 본인의 실험적인 처신에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하나의 미적 세계의 온전한 주인이다.

 

작가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이번 작업의 준거로 삼았다면, 이렇게 된 바에 그의 도상이 가진 추상표현주의의 원리를 살필 필요는 있다. 그것은 아래에서 밝힐 우연과 필연의 조합이다. 우리가 빠트리고 지나간 게 있다. 피사체가 되는 커피 종이컵이다. 컵 한 개에서 작품 한 점을 꺼내는 식이라면, 이번에 공개된 작품 수 이상의 원본들과 또 그것보다 더 많은 재료가 있다는 말이 된다. 작업에 쓰인 모든 재료는 스타벅스 커피 컵이며, 따라서 같은 조건으로 통제가 되는 것들이다. 다름 아닌 스타벅스여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며, 이 프랜차이즈가 가지는 사회 의미에 관한 해석도 여러 갈래로 뻗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 맥락에 관한 작가의 특별한 동기는 없으며, 다만 같은 종이 질과 규격이 작업의 반복되는 성질에 부합하는 장점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애당초 작가가 특정한 커피만을 선택한 취향과 더불어 폐품을 안 버리고 쟁여둔 습관은 무시할 수 없다.

 

어떤 물건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은 소비재에서 저장 장애라는 이상 심리증상으로 드러나곤 한다. 정상적인 범주의 수집과 병리적인 저장 행위의 구분은 모호하다. 최근희 작가의 경우, 모든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버리지 않는 것은 아니며, 마신 컵도 어느 시점에 이르러 작업의 재료로써 쓸모 있음을 각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가 집착하며 버리길 꺼리는 품목은 한두 가지 있으며, 이 예술가에겐 오히려 생산적인 조건으로 양질 전화되었다는 점도 이채롭다. 같은 조건에서 반복되는 재료 생성은 무작위(random)적인 요소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전혀 가늠 안 되는 우연성에만 기대는 건 아니다. 비록 구현되는 패턴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둥근 컵 안에 맺힌 흔적은 일정한 질서 안에서 통제된다. 같은 내용물을 같은 형식 안에 취하는 것 자체가 필연적인 의도이다. 이처럼 우연과 필연이 함께 작용하는 스터캐스틱(storchastic) 과정은 진화생물학에서 고안한 개념이지만 예술이론으로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시야를 더 넓혀도 전망은 다르지 않다. 최근희 작가가 거쳐온 이력이 그렇다. 이전 작업과 최근 작업 사이의 틈새는 한편으론 당혹스럽거나 알기 힘들 수도 있으나 그렇게 혼란스러운 갈지자걸음이 아니다. 도시 공동체에서 뒤처진 채 남은 지리 공간도, 마시고 남은 커피 찌꺼기도 모두 우리가 소비한 잔존물이지 않나. 그는 우리 욕망이 쓸고 간 자리를 돌아보는 관찰자이다.


[시선의 간극(2012/03/20 - 2018/03/30), 시오갤러리. 대구]


구성된 것과 해체된 것 사이에서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 예술사회학)


자본주의의 발달은 물리적 자본축적환경에 대한 과거 자본투자의 교환가치를 보존하는 것과 새로운 축적 공간을 개발하기 위한 이러한 투자가치를 파괴하는 것 사이의 갈림길에 놓여있다.(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름으로 된 세 번째 전시가 벌어진다. 사진작가 최창재가 최근 3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시간의 간극>이라는 제목으로 선보이고 있는 개인 전시는 앞으로 얼마나 더 이어질지 나로서는 당장 알 수 없다. 여기에는 새로운 신작을 포함하는 조금의 변화는 허용하되, 일관성을 세우려는 작가의 고집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고, 전환점 앞에서 뭔가 주저한 느낌도 있을 수도 있다. 시오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 개인전을 그의 작가 생애 안에서 일생일대의 전시로 치켜세울 욕심만 버린다면, 이는 꽤 중요한 전시다. 뭔가 하면, 지금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간을 쓰고 있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공공 예술의 기획 방향과 그가 작품량을 쌓아온 연작 <The city>가 형식적인 면에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바로 그 현재를 가장 가까이에서 드러내는 장소가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해석은 ‘시선의 간극’을 작가가 스스로 밝힌 작품론에서 출발하는 쪽에 치우쳐 있었다. 뭐 그냥 관객의 입장에 머무는 내 안목에서는 그의 사진 세계를 좀 더 쉽게 풀어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간극이란 말이 우리나라 문예계에 바람이 확 불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 탈근대주의 사상이 수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계간지 <외국문학>에 레슬리 피들러(Leslie A. Fiedler)의 논문이 소개되던 무렵이다. 대중문화와 순수문화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피들러 교수는, 아니 그 텍스트를 번역한 김성곤 교수가 간극이라는 표현을 붙였다. 문학에서 많이 쓰이던 이 낱말을 나는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사진 전시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간극은 둘 이상의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의미에서 쓰는 간격과 달리, 대상들이 각자가 향하고자 하는 극점을 두고 떨어져 있다는 뜻이 좀 더 강하지 않나?

 

최창재 작가의 작품이 표현하는 간극도 두 개의 지향점으로 구분된다. 한쪽은 개발이라는 가치이며, 다른 한쪽은 보존의 가치다. 작가는 그 두 개의 논리를 카메라를 통해 관찰한다. 여기에는 대단한 뭔가가 사진으로 포착된다. 하지만 일이 잘못 풀리면 이 논점은 시시한 게 되어버릴 수 있다. 이는 물론 사진가의 잘못이 아니다. 사진기 탓도 아니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우리 수용자 집단이 가지는 문제다. 그동안 이와 비슷한 주제를 띄운 수많은 작품이 자신의 미학이나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그 작업 대부분은 내가 보기엔 있으나마나한 선언들이다. 적어도 <시선의 간극>은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다행히 간극으로 묘사되는 구도가 그 실마리를 품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언뜻 보아 꽤 복잡하게 얽혀있다. 하지만 전체 구도는 굉장히 단순하다. 거기에는 이미 개발을 끝내어 앞으로 한동안은 변하지 않을 땅과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다 뭉개고 새로 개발할 땅, 이렇게 두 장소로 나누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어떤 형태로든 담이 있다. 주로 낮에 촬영된 사진은 물리적인 깊이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고 평면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의 사진에는 잘 없는 게 있고 곧잘 있는 게 있다. 없는 것은 인물이고, 많은 것은 나무다. 주로 개발이 안 된 편에 나무가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시선의 간극>을 인공 대 자연의 구도로 읽힐 것을 경계한다. 나아가 작가 또한 이따금씩 그렇게 개념을 혼동할까 걱정된다. 그 간극은 인공과 자연이 아니라, 제대로 갖춘 인공과 아직 덜 갖춘 인공이다. 우리가 도시 속에서 보는 나무는 인공물의 일부다. 산에 심은 나무, 들에 자라는 작물, 콘크리트로 가둔 강은 그 자체가 자연이 아니라 도시의 연장된 개념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에서 관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사진에 담긴 그곳들이 익명성을 띤다는 점이다. 탈장소성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어딘지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 장소들은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거긴 몇몇 사람 이외에는 관심 바깥에 있는 평범한 곳들이다. 일반인들이 어떤 장소를 핸드폰으로 찍는다면 그곳은 아마 기억에 남겨둘만한 특별한 곳이지, 이런 곳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이 가진 여러 기술이나 예술적 의미에 집중한다면, 시선은 좀 더 넓어져 여기 최창재 작가의 로드뷰에 닿을 것이다.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카메라가 보급되고 성능이 좋아질수록 사진가들은 일반인들의 미적 행위와 차별되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을 저질렀다. 피사체가 된 이곳들도 작가들이 찾고자 하는 탈출구의 전형이긴 하다.

 

작가는 도시 경관의 해체와 재구성을 ‘비결정적 특성’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동력을 인간들의 욕망으로 풀이한다. 내가 보기에, 그가 쓴 비결정성은 그 말이 주로 쓰이는 신과학의 카오스 이론보다는 사회 제도에서 행정 개입의 한계를 가리키는 의도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예컨대 공적인 규제를 피하고자 하는 개인 행위자의 사적 이윤 추구는 재개발 열풍이나 아파트 숲과 같이 시각적으로도 특별한 결과를 이끌어낸다. 사회과학자들과 자연과학자들은 그 패턴의 상당부분을 이미 밝혀내고 있다. 가령 은하계 군집의 패턴이나 주식 시세, 미술작품 가격과 정당지지율, 도심 교통량 등과 같은 ‘비결정성’에 닿은 현상에 관한 연구는 통섭된 탐구 방법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작가의 문제의식 또한 지리학과 사회학에서는 예전부터 공유되어 온 주제다. 서두에 밝힌 데이비드 하비의 고색창연하지만 간결한 분석이 그 예가 되겠다. 하지만 예술가와 과학자가 같은 세계를 보며 풀어내는 방법은 다르다. 사진 속 담벼락이 현실 속에서는 법을 등에 업은 강제적인 개입이지만, 그의 예술 속에서는 인지의 중재를 위한 장치가 된다. 그래서 말인데, 몇 가지 특별한 절차를 통해 경계 구실을 하는 담을 시각적으로 더 환기시키는 기법을 궁리하면 좋으리란 생각은 내 욕심인가?

 

그가 프레임 속에 넣지 않은 나머지 바깥쪽 경관이 궁금하다. 행정가나 과학자는 일체의 공간에 대한 통제나 분석을 욕망하지만, 이 예술가가 가진 원칙적인 희망은 화면 구성과 배치에 대한 완성이다. 스스로를 비주얼 아티스트라고 칭하는 최창재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계를 재단하고 해석하길 원한다. 이 또한 현실에 대한 발언이다. 동시에 이는 순수한 예술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느 쪽으로 그의 작품으로 보더라도 상관없다. “문학 비평의 역사는 곧 오독의 역사”라고 폴 드만(Paul de Man)은 말했지 않나. 최창재 역시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오독하길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 사이에 걸친 간극을 자신의 작품을 메타포 삼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